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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관련 보도자료

[월간조선 뉴스룸 칼럼] 한국 최초로 日人 승려 추모 사리탑, 경주에 세워지다!
"한국·일본·북한, 문화(재)로 평화의 접점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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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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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왔다. 경제도 어려운데 날씨마저 사람들을 괴롭힌다. 필자는 지난 17일 새벽 서울역을 출발하는 KTX를 타고서 경주에 갔다. 경주역에서 택시를 타고서 경주 자비사(주지: 현도 스님)로 달렸다. 일본의 가키누마 센신(柿沼洗心, 1932-2009)스님을 추모하는 사리탑 제막식이 있어서다. 이 날의 제막식에는 박삼중 스님을 비롯해서 현도 스님, 박태승 전 6·25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장, 박근목 북관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200여 명의 신도들이 참가했다.
 
9층 사리탑의 상단에는 불사리·목련존자사리·사리불존자사리가 봉안됐고, 하단에는 故 가 키누마 센신 스님의 유품(머리털)이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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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사리탑의 제막식 모습


가키누마 센신 스님은 누구일까.

그는 국적을 초월해서 한국과 일본의 가교 역할을 실천했던 스님이었다. 스님은 한·일불교복지협회 일본 측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한국 측 회장인 박삼중 스님과 한·일 불교문화교류에 앞장서기도 했다.
  
스님은 불교문화교류를 넘어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달래는 일도 해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가 묻어버린 귀무덤(耳塚)과 코무덤(卑塚)의 환국을 주도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길주에서 의병대장 정문부(1565-1624) 장군이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1562-1611)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건립했던 북관대첩비의 환원도 가키누마 센신 스님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가져가서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있었다. 이 비는 한국으로 환원된 후,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졌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관북,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과 공로가 1500여 글자로 기록돼 있다.

한국인도 못한 일을 일본 스님이 해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제막행사에 참가한 박삼중 스님은 법문을 통해서 가키누마 센신 스님의 추모탑이 세워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요즈음 한일 관계가 너무나 좋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스님의 추모 사리탑을 세운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스님은 한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신 분입니다. 일본에 있던 귀(耳)무덤과 코(鼻)무덤을 한국으로 이장시켜서 영혼을 달랬고, 일본군이 탈취해간 북관대첩비를 제자리에 놓이게 했으며,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송두리째 뽑아간 울산동백(오색팔중산춘)을 원산지로 귀환토록 하셨습니다... 오늘(11월 17일)은 스님께서 열반하신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스님이 열반하신 그 날에 서라벌 남산의 끝자락과 토함산을 바라보는 중간 지점인 경주자비사 경내에 추모 사리탑이 세워진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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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을 하는 박삼중 스님

 

 

또한, 삼중 스님은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난조인(南藏院)의 하야시 가쿠죠 주지 스님이 오랫동안 미얀마에서 베푼 자비의 답례로 그 나라의 불교기관에서 증정 받은 사리(舍利)의 일부를 기증한 일에 대해서도 감사의 뜻을 표했다. 난조인은 세계 최대의 청동 와불상(臥佛像)이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삼중스님의 법문은 1시간 30분 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북관대첩비의 환원은 국가가 아닌 민간차원의 쾌거
  
가키누마 센신 스님이 살아있을 때 여러 차례 만났으며, 북관대첩비 환원 당시 한국범민족본부장이었던 박근목(73) 이사장도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삼중 스님이 말씀하신바와 같이 가키누마 센신 스님은 22년 간 한일 우호증진에 진력하신 분입니다. 저는 당시 북관대첩비 환원 실무본부장이었습니다. 북관대첩비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한 시발점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북관대첩비의 환원은 국가가 아닌 민간차원에서 이뤄진 것 아닙니까? 정부도 이러한 일에 아낌없이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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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사리탑 제막식에 참가한 박근목 북관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

 
박근목 이사장은 “문화와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비는 일본으로 간 지 100년(2005년 10월)만에 고국에 돌아왔고, 다음 해(2006년 3월 1일)에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덧붙였다. 그 중심에 가키누마 센신 스님이 있었던 것이다
 
추모 사리탑 제막식 참석을 위해서 대구에서 온 박태승 전 6·25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장도 탑의 의미 부여를 새롭게 했다.
 
“석가탑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것이라면, 오늘의 추모 사리탑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가키누마 센신 스님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큰 업적을 남긴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어나가야 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통영에서 온 여성 신도도 “같은 동포끼리도 말로는 우호(友好)를 외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면서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스님이 행동으로 우호를 보여주심에 있어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우호증진’을 바라는 순수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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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에 봉축하는 신도들

 

 

추모 사리탑이 세워지기까지 모든 것을 주도한 현도 스님은 “조용히 행사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놀랐다”면서 “故 가키누마 센신 스님과 후쿠오카 난조인의 하야시 주지 스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추모 사리탑 제막행사는 참석자가 다함께  <공양예참>을 올림으로서 마무리됐다.
 
<삼계 모든 중생들의 길잡이시고
 사생의 자비로운 어버이이신
 우리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께
 신명 다해 지심(至心)으로 공양합니다.>
 
이날의 추모 사리탑 제막식은 가키누마 센신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것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갈등을 잠재우고 ‘우호증진’을 바라는 민간인들의 순수한 마음도 담겨 있었다.
 
행사가 끝이 났는데도 신도들은 탑 앞에서 합장을 하면서 새로 탄생한 추모 사리탑의 의미를 오랫동안 되새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