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과 정문부장군
화첩'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에 실려 있는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
북관대첩이란? 선조 25년(1592년) 7월 15일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이 22,000여명 대군을 거느리고 동북의 함흠으로 진격하여 함관령 이북 1,000리 땅을 점령하였다. 관군은 거의 모든 수령방백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나 전쟁을 하려 해도 군사가 없었던 정문부(鄭文孚) 장군은 의병을 모아 내부 반도 평정과 동시에 피난을 나와 있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등을 왜구에게 넘겨 주었던 역도 국세필과 정말수, 국경인 등을 포박, 참수하고, 명천 일대를 수복하니 백성이 의병에 크게 호응하여 나중에는 그 수가 7,000명이 넘었다. 경성전투, 길주-장평전투, 쌍포-임명전투, 길주 남문 밖 전투, 단천전투, 백탑교전투, 여진족을 격퇴시키는 등 총 8차례의 전투 속에 왜군을 격파하여 함경도 지역에서 몰아낸 큰 전투이다. |
높이 187cm, 너비 66cm, 1,500여 자(字) 기록. |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란?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정문부(鄭文孚)장군이 최초로 의병(義兵)을 규합, 왜군을 격퇴한 전공을 기념해 숙종 33년(1709)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리에 세워진 승전기념비(勝戰記念碑)이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제 2사단 17여단장 이께다 소장이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가져간 뒤 항일 의병의 기상을 제압하고자 탑신에 큰 바윗돌을 올려놓은 채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방치되어 있다가 2005년 10월, 100년 만에 남·북·일본간 민간 외교로 반환받아 민·관 공동노력으로 일본정부로부터 반환받아 북한에 인도하여 원소재지인 함경북도 길주에 복원한 국보급 문화재이다. |
정문부(鄭文孚)장군에 대해서 1565(명종 20)~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서울 출신. 정희검(鄭希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각(鄭殼)이고, 아버지는 부사 정신(鄭愼)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김흥례(金興禮)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역임하고 1590년 사헌부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했으며, 다음해 함경북도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鎭)을 순찰하였다. 1592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을 당했는데, 회령의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황혁(黃赫) 등을 잡아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해 최배천(崔配天)·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각 진의 수장(守將)·조사(朝士)들과 합세해 의병을 조직하였다. 먼저 국경인·국세필(鞠世弼)을 참수(斬首)하고, 이어 명천·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長德山)에서 싸워 대승하고, 쌍포(雙浦) 전투와 이듬해 백탑교(白塔郊) 전투에서 대승해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1594년 영흥부사에 이어 온성부사·길주목사·안변부사·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장례원판결사·호조참의가 되었고, 그 해 중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다음해 예조참판, 이어서 장단부사·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남원부사가 되고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직을 자청하였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북인(北人)의 난정(亂政)을 통탄해 나가지 않았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이 되고, 다음 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다가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다. 후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부령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농포집』이 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