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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관련 보도자료

[오늘의 한국] 임란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남충무 북충의(南忠武 北忠毅)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호국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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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5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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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남충무 북충의(南忠武 北忠毅)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호국인물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던 충의공 농포(忠毅公 農圃)
정문부 선생은 안타깝게도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문부 선생으로 말하자면 북관대첩비의 주인공이자 얼마 전에 방영된 KBS드라마 <징비록>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이 납치되어 조정을 들끓게 만들었던 함경도 (북관)을 평정한 장군이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유명하지만 남한에서는 교과서에 몇 줄 정도의 설명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남충무 북충의(南忠武 北忠毅)라고 할 정도로 정문부 선생의 공을 크게 기리고 치하했다. 이는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의 해전 승리와 정문부 장군의 육전 승리가 해상전과 육지전에서 전란을 제압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대표적 싸움으로 ‘관군에서는 이순신, 민간군에서는 정문부’를 손꼽는다는 것이다. 정문부 선생은 1565년 2월 19일 누대를 걸쳐 벼슬을 한 명문대가에서 태어났다. 서울 남부의 반송반 남소동(현재 장충동)에서 청송부사와 대사간, 내자사정, 예조판서 등을 지낸 정신(鄭愼)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8세때 벌써 5언절시를 짓기도 했는 데 그시상이 뛰어나고 응대하여 당시 선비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11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했으며 여가를 틈타 간간이 활쏘기를 익혔고, 통솔력이 강해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할 때는 항상 호령하며 지휘했다. 이후 21세에 생원 · 진사시험에 모두 합격했고, 23세에는 성균관에 유학해 학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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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덕사및묘역 전경

그리고 24세 때인 1588년 가을, 명경과에 급제한 이후 승정원, 홍문관, 사간원을 거처 정 5품에 해당하는 사헌부로 승승장구하는 등 앞날이 촉망됨에도 불구하고 1591년 조정의 벼슬으 버리고 정 6품에 해당하는 함경북도 병마평사를 제수 받아 격지로 떠난다. 이는 그가 얼마나 강직한 성품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도병마평사로 부임할 당시 정문부 선생은 지방의 교생들을 모아 친아우 대하듯 가르치고 아껴 모두 그를 부형같이 따랐다. 백성과 병사들에게도 덕과 예로서 다스리니 북도 사람들은 모처럼 관(官)으로부터 사람 대접을 받게 되자 모두 크게 기뻐하며 그의 덕망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왜적이 쳐들어와서 함경도가 함락되자 정문부는 동지들과 함게 의병을 일으키는데 단 시일 내에 수천 명의 군사가 호응하고 정문부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데 모두가 찬성할 정도로 그의 인품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정문부 선생이 의병활동을 했던 관북지방은 전국 어느 곳 과는 비할 수도 없는 극악한 조건하에서 의병궐기였고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그 공은 더욱 돋보인다. 관북지방은 오랜 세월 동안 중앙정부로부터 천대받고 조세노력이 다른 지방에 비해 과중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 수탈로 원성이 자자하고 심지어는 수령방백들이 토적들에게 잡혀서 살해당하는 일이 잦을 정도로 민심 이반이 극심했던,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의병투쟁의 주적인 침략 왜군을 제압하기 전에 먼저 조국을 배반하고 침략왜군에 부동(符同)하여 부역(附逆)하는 반민(叛民)세력을 소탕해야 하는 딱한 상황이었다. 다른 지역의 의병활동은 비록 왜군 지배하에 놓여 진 점령지라고 할지라도 그 지역민의 총체적 지지와 협력을 얻어 의병 투쟁을 전개했었다는 점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지역이 지역행정력이 어느 정도 유지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정문부 선생의 의병투쟁은 반군세력에 의해 행정이 난맥에 빠져 오합지졸과 같은 민초(民草)의병을 규합하여 이루어진, 그야말로 민초의병의 충성만으로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그 공을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그 열악함은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 두만강 건너 북적(北狄)인 오랑캐가 쳐들어오지 않도록 대비해야 하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함북의 북관 6진(六鎭)지방은 조선전기의 거듭된 야인정벌(野人征伐)로 오랑캐를 두만강 건너로 몰아내고 확보한 우리 국토였다. 그러기에 두만강 북으로 쫓겨난 오랑캐들이 항상 재침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두만강 남쪽 지방인 북간에서는 정치적 군사적 혼란은 그들의 남치의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정문부 선생의 의병투쟁은 남으로부터 압박을 가하는 침략 왜군에 대한 전쟁과, 안으로 왜국에 부동하는 반국세력, 그리고 북에서 남침의 기회를 엿보는 여진족을 억제하여야 하는 전략을 동시에 취해야 하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에 정문부 선생은 먼저 반민의 토벌과 북방대비의 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한편 관북민의 힘을 결집해 남으로 왜적토멸전을 전개한다.
 
 1591년 7월 가등청정과 과도직무는 약 2만2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황해도 금교역에서 함경도로 향했다. 왜적들은 철령을 넘어 풍우같이 내달려 관군인 남병사 이혼(南兵使 李渾)군을 만나 일거에 대패시키고 안변(安邊) 영흥(永興) 함흥(咸興)을 거쳐 7월 15일 단천(端川)에 도착한다. 이에 함경도 관군인 한극함(韓克諴)은 6진의 군사를 이끌고 마천령(摩天嶺)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위 체제를 구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에 굴하지 않고 한극함은 기병대로 하여금 좌우로 달리며 활을 쏘게하자 적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창고로 들어가 숨게 되자 군사를 지휘하여 적을 포위했다. 그러나 왜군은 곡식섬을 성 모양으로 쌓고 우리군사의 시석(矢石)을 피하여 조총을 쏘아대니 아군의 피해가 커져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었다. 한극함은 할 수 없이 군사를 거두어 고객 위로 물러나서 진을 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왜적이 야음을 이용해 아군을 포위하고 매복해 있다가 총소리를 신호로 습격하니 진중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많은 군사들은 일시에 흩어지고 진창에 빠지게 된다. 이것을 본 적군이 쫓아가서 긴 칼로 베이니 우리군사는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이 싸움에서 패한 한극함은 경성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적에게 사로잡히는 굴욕을 당한다. 당시 정문부 선생은 경성 유생인 지달원(池達源)의 집에 머물었는데 그 집은 경성 바닷가 벽지에 있었다. 조선이 바람 앞에 꺼져가는 등불처럼 위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 한 가닥 희망적인 소식이 날아들게 된다. 바로 명나라 원군이었다. 지달원과 최배천이 의병을 일으켜 정문부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 28세였다.

 그리고 교생과 면식이 있는 무사들을 모으게 되었는데 전만호 강문우(前萬戶 姜文佑)를 비롯해 사병장사(士兵將士) 수백명을 얻게 된다. 뒤이어 종성부사 정현용(鍾城府使 定見龍)과 경원부사 오응태(慶源府使 吳應台)가 산중에 숨어 있다가 나오니 이를 맞이하여 같이 거사키로 하였다.

 드리어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면서 경성 성문을 향해 진군하게 되자 적으로부터 예백(禮伯)이라는 벼슬을 받고 병사로서 행세하고 있던 국세필이 별안간 일이라 어찌할바를 모르고 문을 닫고 저항했다.
 국경인(鞠景仁)과 국세필(鞠世弼)은 전주 아전출신으로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던중 흑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회령에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납치했다. 그리고 두왕자를 왜장 가토기요마사에게 넘기며 투항해 그 대가로 병사(兵使)벼슬을 얻어 회령과 경성을 다스리고 있었다.

 

 하루는 정문부 선생이 촌민으로 위장을 하고 용성(龍城)을 향하여 남쪾으로 가던 중 우연하게 무인(巫人) 한인간(韓仁侃) 집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자 무당이 가만히 선생을 바라보기 시작하더니 말했다.
 “아니 평사(評事)님이 아니십니까?”
 “나는 한양 상인인데 난을 만나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는지라 주인은 어찌 망녕된 말씀을 하오.”
 그러나 무당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정문부 선생의 비범함을 한분에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을 했다. 며칠이 지났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추석날 무당이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데 그 제찬(祭饌)을 선생헤게 먼저 드리는 것이엇다.

“이것은 예가 아니오. 어찌 제사를 하기 전에 먼저 제찬을 먹을 수가 있소?”
그러자 무당이 대답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천인(賤人)이므로 가령 살아 있더라도 평사겟 이곳에 계신 바 반드시 먼저 드시지 않을 것입니다.”
 정문부 선생은 이곳 무인 집에서 최배천과 이붕수(李鵬壽), 강문우, 정현룡 등을 만나 의거를 모의하게 된다. 그러자 피난중인 조사(朝士) 서성(徐渻), 이성길(李成吉)등이 구름같이 모였다. 무당의 남편은 연락병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는 국세필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이 때문에 무당의 남편은 경성주(鏡城府)내의 동정과 국세필의 비밀 정보도 잘 알아낼수가 있었다.
 정문부 선생은 무엇보다 반역세력이자 폭악한 국세필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주살하기에는 너무 강적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의병의 수가 상대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모와 지략으로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머지않아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올 터인 즉 우리들은 다 죽게 되었다.”
 당시 왜적 뿐만 아니라 북쪽 오랑캐들이 자주 침범하여 약탈 행위가 심해 모두들 두려워하던 차였다. 소문이 떠돌자 부중(府中)에는 얼마 안가서 오랑캐 공포로 떠들썩하게 된다. 정문부 선생의 명을 받은 무당의 남편은 국세필을 찾아갔다.
 국세필은 ‘오랑캐가 쳐들어온다고 하니 큰일이로구나’ 하고 말했다.
 이에 선생은 평소부터 국세필과 친분이 있는 최배천을 은밀히 보내어 세필이를 매수하라고 했다.
 최배천은 세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가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데 자네가 만일 정평사(鄭評事)와 힘을 합하여 북쪽 오랑캐를 막는다면 그 공이 클 것이다. 정평사는 위세와 명망이 대단하니 의병을 모집하는데도 그리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네”
 이 말에 세필은 반대하지 않고 수긍하는 눈치를 보였다.

 국세필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정평사는 인자한 분으로 소문이 나 있으니 의병 활동에 협력한다면 목숨은 살려 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설사 일본군으로부터 예백이라는 벼슬을 받고 비록 반역 행위를 했다하더라도 일본군에 의해 조선의 임금이 바뀐다는 소문이 있으니 왜적에게 협력한 행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배천은 곳 돌아와서 대장인 선생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정문부 선생은 망설이지 않고 약간의 군사만 대동하고 단기(單騎)로 세필에게 달려갔다. 측근들은 그렇게 위험한 곳에 어찌 적은 군사만 대동하고 가느냐고 말렸다. 그러나 국난을 이기는 일에는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반역세력을 평정하고 왜적을 물리쳐야하는 절체절명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국세필이 응거한 성 아래에 도착해 만나자고 전갈하니 세필은 의심을 풀지 않은 채 좌우에 호위군사를 세우고 의병대장을 맞아들였다.
 선생은 세필에게 국난을 당하여 힘을 함쳐서 공을 세우자고 타일렀고 결국 그가 성문을 열고 장수들과 의병들을 모두 입성하게 했다. 이날이 임진년 9월 16일 이었다.
 국세필은 가지고 있던 병부(兵符)를 선생에게 바쳤다.

 정문부 선생은 “이제부터는 대소민병(大小民兵)들의 범죄는 묻지 않겠다. 국세필은 종전과 같이 병권을 행사하라. 활 잘 쏘고 용감한 자는 역시 비장(裨將)으로 등용할 것이다.” 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세필의 휘하에 있던 군졸들이 전부 의병으로 흡수되고 이 군사들을 매일같이 날이 저물어서야 파하는 습전(習戰)과 훈련을 시켰다. 측근 장수들은 세필을 빨리 참(斬)하자고 진언했으나 선생은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고 했다.

 정문부 선생은 사람을 회령의 국경인과 명천 정말수에게 파송하여 세필도 의병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있으니 전죄를 씻고 의병에 들어온다면 환영하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교활한 국경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만약 국세필만 먼저 참하면 국경인이 정말수를 도저히 없앨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선생은 은밀히 이미 의병에 가담되어 있던 오윤적과 신세준들에게 밀명을 내려 경인과 말수를 참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오윤적이 토적(討賊)을 모의하다가 경인에게 발각되어 목숨이 위태로운 일측촉발의 상황에 몰렸다. 그렇게 꼼짝없이 죽게 된 것이다. 죽인을 당하기 직전 신세준이 기지를 발휘해서 부민들과 함세해 경인을 참하게 된다. 그 무리 6명을 함께 주살하고 수급(首伋)을 바쳤다.

 

이제 남은 것은 정말수를 처리하는 문제였다. 선생은 즉시 오촌권관 구황(吾村權管 具滉)과 강문우에게 군사 60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정말수를 참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밤낮을 가리지않고 명천에 당도했지만 정말수는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그러나 강문우가 끝까지 추적해 정말수를 잡아서 참하고 그 수급을 가지고 돌아왔다. 국세필은 외부 연락이 차단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 이튿날 강문우는 세필을 붙잡고 문을 부수어 국세필과 그 일당 13명을 참해 반해세력을 전부 소탕하게 된다. 정문부 선생은 군병들에게 ‘이제 반적을 죽이는 것은 이것으로 끝났으니 더 이상은 동요치 말라’하니 사기가 크게 충전하였다. 이 때 의병의 군세는 3천 여명에 이르게 됐다.

 이제는 왜적과 맞서 싸워서 조선을 구해야 한다. 정문부 장군은 군사를 모아놓고 ‘이제 우리가 모두 나가서 왜적을 치고자 하는 데 너희들의 의견은 어떤가!’ 하고 외치자 군병들은 모두 대장의 말씀에 따르겠다고 했다. 군사들의 사기는 높았다. 이제 왜적과 결전을 앞둔 셈이다. 정문부 선생은 성내에 있는 의병 3천명 가운데에서 정예부대를 선발해 선봉에 서게 해 고령첨사 유경천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했다. 길주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주성은 산세가 험준한 요새로써 왜장 가등우마윤이 1천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왜군의 퇴로를 막아 섬멸하며 남하해 가토가 지키는 길주성에 이르렀다. 강문우가 결사의 기마대 20여기로 문을 열고 돌격해 나가니 왜적은 불시에 기습을 당하니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에 바빴다. 강문우는 기마대를 몰아서 추격해 영강역(永康驛)에 이르러 모조리 쓰러트렸다.

이윽고 해는 저물고 비마저 내리기 시작했다. 강문우가 돌아오지않자 성안에서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적에게 투항한 것이다.’
 이처럼 성루에 올라앉아 걱정하면서 사후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던 차에 강문우가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가 야반 삼경 무렵이었다. 강문우는 적의 수급 수십을 허리에 차고 와서 성문을 두드렸다. 모든 군사와 전마들은 인마(人馬)의 피로써 귀신같은 모습을 하고 적의 수급을 말 안장에 매어 놓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적의 칼이며 창 그리고 조총으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개중에는 적의 전마를 바꾸어 타고 또 부마(副馬)로 끌고 오는 군사도 눈에 띄었다.

 이날의 전투는 압승이었다. 군사들의 늠름한 기백에 탄복한 성중병사들은 더욱 높아졌고 대의를 위해 몸 바치겠다는 결의는 더욱 굳어져 갔다. 당시 일복측 기록인 고려진각서(高麗陣覺書)에 보면 ‘길주성 이웃에 있는 장덕산에 포진, 공격해 온 정문부부대를 성을 나와 요격하던 일본군은 밤이 되면서 추위로 동사자가 속출하는 탓에 성안으로 퇴각하였고, 성은 완전히 포위당하였다. 성 안의 일본군은 혹한의 땅에서 가장 중요한 석탄과 채소의 공급이 차단되는 바람에 가토의 오른팔이 무력화되었다’ 고 패배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추위 때문으로 돌리고 사상자도 밝히지 않았다. <글 마연옥기자>

 

 

100년만에 일본에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북관대첩비

 

왜군 격퇴한 정문부 장군 기리기 위해 함경도민이 세워

 

 북관대첩비는 임란이 종식된 백여 년 후인 1707년(숙종 34) 10월에 임진왜란 때 대승을 거둔 함경도 의병장 충의공 정문부 선생의 전공을 기리기 위에 세워졌다. 당시 행주나 연안 땅에는 권율장군, 이정암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건립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조건하에 궐기, 민병부대인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워 거듭 승리를 거두고 침략군을 축출한 충의공과 그 휘하 의병들이 거둔 승리의 사실을 후세에 전할 사적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관북지방의 뜻있는 인사들이 대승을 거둔 역사적 현장인 임계(臨溪) 땅에 건립한 <유명조선국 함경도 임진의병 대첩비(有明朝鮮國 壬辰義兵大捷碑)>이다.

 비의 높이는 190cm, 폭66cm, 두께 13cm, 글자수 총 1,420자로 당시 최창대가 글을 지었다. 내용은 의병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의병에 참여한 구성원들의 직위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임란 때 함경도에 진출한 기요마사의 군대와 의병들의 교전 그리고 이들의 격퇴시킨 정문부를 의병대장으로 한 의병들의 공적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관북지역 의병사를 연구하는 기초자료로서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 때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 예비사단 소장 이케다마사스케가 이 비석을 발견하고 일본 왕실에 보고해 반출한다. 그는 그들의 조상인 가등청청군이 패당한 패전의 치욕을 적어 놓은 이 비석이 조선 백성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을 협박해 비석을 파내어 일본으로 옮겼다. 1978년 한국인 유학생인 ‘조소양’ 이 최초로 발견해 그 견문기를 한 잡지에 실었다. 당시 이 비석은 군국일본(君國日本)의 상징인 도코 야스쿠니신사에 방치외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1978년 최서면 동경 한국연구원 원장이 경내를 뒤져 재발견해 국내신문(조선일보 1978년 4월 12일자)에 소개하게 된다.

 

당시 문교부사회교육국장 정태수, 해주정씨 대종친회 회장 정채섭, 종손 정규섭 등 후손들 3명 이름으로 정부에 비의 탄환서를 제출한 것이 반환운동의 시동이 되었다. 그 탄원서를 받은 문화공보부에서는 외무부에 이첩, 외무부에서는 주일대사에게 지시하여 반환을 요구하였다. 북관대첩비는 한반도 민족사에 있어서 민족저항 정신을 일으킨 대표적인 상징물인 동시에 한반도 민족의 외세 극복정신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소중한 비석으로 국보급 문화재이다. 그럼에도 일본 측은 야스쿠니 신사의 존전 옆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는 어두침침한 숲 속으로 옮기고,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철책으로 둘러쳤다.

 정문부 선생의 후손인 해주정씨(海州鄭氏) 종중(宗中)과 민간단체 그리고 정부가 협력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내는 등 반환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일명의 이유를 달아 반환치 않다가 결국 2005년 10월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반출된 지 10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당시 해주정씨 대종친회 정태류 회장은 반환과정에 있어 어떠한 경우라도 정치성과 이권이 개입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입장과 북관대첩비를 정문부 장군의 묘역이 의정부에 있다는 점을 들어 바로 북한으로 보내질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될 때까지는 그 분의 묘역이 있는 의정부에 세웠다가 남북통일이 되면 북한의 원래 있던 길주로 가야한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하지만 문화재관리 법상 길주시에 다시 세워졌고, 경복궁과 정문부 묘소 입구와 진주 충의사 등 4곳에 복제비를 세웠다.

 

정두섭 해주정씨 대종친회 회장은 추의공 정문부를 위시한 의병들의 공적을 기린 북관대첩비가 2005년 10월 일본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100년 만에 환국되어 많은 국민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끌었으며 2003년 11월 호국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충의공 일대기를 영화 또는 TV드라마 제작과 나아가서 충의공 기념 사업회 또는 충의공 선양회등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