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뉴스] 북관대첩비 반환 주역이 바뀌었다?
"재일교포 하갑순, 가끼누마 센신 스님 주도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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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6년 02월]본문
▶ 사진 : 하갑순 위원장과 일본 가끼누마 센신 스님
지난 해 10월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에 강탈된 북관대첩비가 100년 만에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정부에 반환됐다. 북관대첩비가 일본으로부터 반환되기까지는 수많은 애국시민과 단체들의 눈물겨운 반환운동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북관대첩비환국범민족운동본부’의 공동집행위원장인 하갑순(83세)의 각고의 숨은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져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애국시민과 단체들의 피땀 흘린 각고의 노력으로 북관대첩비가 반환되었지만 정부의 무책임한 처사와 사리사욕에 눈 먼 정치권의 개입으로 이들의 수고가 헌신짝처럼 사라지게 되어 가슴이 아픕니다.”라며 하 공동집행위원장이 분노를 터트렸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에 100년 동안 방치된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해 투쟁해 온 ‘북관대첩비 범민족운동본부’ 하 공동집행위원장은 “정부는 북관대첩비 환국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찾아내어 격려와 보은을 베풀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북관대첩비가 100년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왔지만 환국(還國) 운동 추체들의 노고가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관대첩비가 반환되기까지 숨은 공로자로서 촉매 역할을 해 온 하 위원장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북관대첩비의 상징인 임진왜란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장군의 후손 정규붕(鄭奎崩) 씨의 아내이다. 10여 년간 재일교포의 신분으로 설움 속에 일본에 살아온 하 위원장은 “일본에서의 대동아전쟁(2차 세계대전)과 한국에서의 6.25 전쟁을 겪으며 남북 분단이 가져다 준 민족의 한(恨)이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며 남은 여생동안 통일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북관대첩비 환국(還國) 운동이 활발하게 된 계기는 하 위원장이 ‘일·한 불교복지협회’의 가끼누마 센신 스님과 오래전부터 환국운동을 해오던 중 ‘한·일 불교복지협회’의 초산 엄태종 스님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그녀는 가끼누마 센신 스님에 대해서 “세계 평화주의자이며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일본의 침략적 역사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서 한국 문화재 반환 운동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사실 북관대첩비가 반환되기까지는 2000년 ㅇ리본의 가끼누마 센신 스님과 한국의 초산 엄태종 스님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하 위원장은 두 고승에 대해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북관대첩비의 환국만을 위해 한국, 일본, 북한을 왕래하며 민간외교서절의 역할을 해 온 일등 공로자”라고 치켜세웠다.
북관대첩비 환국(還國)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선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서 100년 동안 북관대첩비가 큰 바위에 눌려 방치된 것을 지켜보며 가끼누마 센신 스님의 “일본국 과거사에 대한 죄업을 북관대첩비환국을 통해 참회해야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아 북관대첩비 반환에 앞장서게 됐다고 말했다.
북관대첩비가 100년이라는 한 세기만에 반환되었지만 그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북관대첩비의 원 소재지가 북한이라는 점, 또 민간종교법인의 보유물에 대한 정부의 관여가 곤란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야스쿠니 신사측의 입장도 “남북이 통일되면 되돌려 주겠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하 위원장은 “한국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의 사비를 털어가며 환국(還國)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 위원장은 북관대첩비의 환국이 지닌 의의에 대해선 원소재지인 함경북도 길주 임명리에 복원하는 일이야말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반대하고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실천적인 의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한·일간 우호증진과 협력의 상징이다. 한국과 북한, 일본 정부 간 민간외교의 쾌거이며, 남북 공동의 실천의지를 실행한 역사적 사건”이라며 열성을 토했다.
최근 그녀는 한반도 통일의 보탬이 되기 위해 여성 중심의 문화운동과 교육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소재의 해인 합천 중학교를 1974년에 설립하여 현재까지 이사장으로서 31년 동안 재직하고 있으며, 2004년 11월에는 ‘한민족 여성지도자포럼’을 발족 시키키도 했다. 또한 사단법인 ‘한민족문화선양회’를 설립시켜 이사장으로서 한민족문화를 국내외에 선양하고 문화민족으로서의 주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 이사장은 여성 중심의 문화운동을 전개하는 이유에 대해 “통일 정책과 통일 운동 분야에서 여성 참여율이 낮고 남성의 전유물이 되어있기 때문에 여성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성의 힘만이 한반도 평화를 살릴 수 있으며 여성이 앞장서는 것이 한민족문화를 국내외에 선양하는 지름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향후 하 위원장은 “이번 북관대첩비 환국(還國)을 계기로 글로벌 시대에 한국과 일본, 북한 간 지속적인 협력 속에 투명하고 공정한 새로운 문화 기획단을 구성하여 제 2의 북관대첩비 환국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에 강탈당한 우리 문화재 반환 운동에 정진하겠다.”고 열성을 토했다.
이처럼 고난과 투쟁의 과정 속에 북관대첩비가 반환됐지만 현재 하 위원장의 마음속에는 반드시 풀어야 할 한 가지 응어리가 있다. 하 위원장은 “북관대첩비 환국(還國) 운동의 주체들의 헌신과 수고가 철저하게 무시된 채 북관대첩비와 전혀 상관없는 정치인들을 비롯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써 이용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실제로 북관대첩비 관련, 정부의 정책과 언론 보도는 하 위원장을 비롯한 북관대첩비반환 주역들을 보상하고 보도하기 보다는 북관대첩비와 전혀 상관없는 정치권과 각계 인사들을 비추며 국민의 진정한 알 권리가 철저하고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최근 시민단체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는 상황이다.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회’(약칭 부추연)의 윤용 대표와 활빈단 홍정식 단장은 “북관대첩비 환국 하나만을 위해 애써 온 애국자들의 gsk이 서린 공로는 묻히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소수의 권력자들만 덕을 보고 있다”며 정부는 이들의 노고를 반드시 보상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 북관대첩은 어떤 전투였나?
북관대첩은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함경북도 길주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왜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군단은 최강 군단의 군편성에 최신예 철포부대를 배치하여 부산 상륙에서 한성, 함경도까지 진 적이 없던 최강군단이었다. 함경도를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는 조세첩을 만들어 농민에게 세금을 거두는 등 함경도 지역 지배권을 강화한다. 의병장 정문부는 최강군단과 맞선 6전 연승! 왜군을 격퇴하여 함경도 밖으로 몰아냈다.
- 북관대첩비는 왜 야스쿠니 신사에 있었나?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 북평사였던 정문부 장군의 의병을 규합, 왜군을 격퇴한 전공(북관대첩 : ‘북관’은 함경도의 옛 말)을 기념하여 숙종 34년(1707)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건립한 전공비이다. 임란 때 조선 육군의 대 승전을 담은 기록이 적혀 있는 비가 바로 북관대첩비인 것이다. 이 비가 왜, 어떻게 일본으로 가게 됐는가? 북관대첩비가 세워지고 약 200년 후인 1905년, 러일전쟁 와중에 일본군 미요시 중장이 이 비를 강탈해 가는 비극이 일어난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로 넘겨지게 되었다.
- 잊혀진 영웅 의병장 정문부 장군은 누구인가?
그는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로를 세운 영웅이지만 비극의 영웅이기도 했다. 정문부는 명종 20년(1565)에 한양에서 출생, 시문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농포집’이라는 시집까지 남긴 문인으로 문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던 중 27세에 함경도 북평사를 자진하여 함경도와 인연을 맺는다. 임란이 발발하자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두 왕자를 왜군에게 팔아넘긴 국경인 등의 반란군을 처단하고, 육지전에서 기록적인 연전연승을 달성하여 북관대첩의 영웅이 된다. 그러나 그를 시기한 관찰사 윤탁연의 축소 보고로 살아생전 그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채, 60세 고령의 나이에 역모사건에 휘말려 혹독한 고문에도 무죄를 주장하다 결국 사망한다. 그 후 정문부의 명예가 회복되고 그의 공적을 기록한 북관대첩비가 세워지기까지 100년... 북관대첩비만큼이나 비운의 삶을 살았던 잊혀진 영우이 바로 정문부이다.
- 고난과 투쟁 속에 결실 맺은 북관대첩비 반환 운동
1909년 일본 유학생이던 조소앙 선생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이 비를 보고는 <대한흥학보>에 ‘북관대첩비 사건의 소감’리라는 글을 투고했다고 한다. 이 후 1978년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군 미요시 중장이 강탈해 간 북관대첩비를 한국사 연구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발견하자 국내에서는 본격적인 반환운동이 시작된다. 그러나 정문부 장군의 후손인 해주 정씨 문중이 신사 쪽에 반환을 요청하고, 박정희 정부까지 나섰으나 비의 반환은 성사되지 않았다.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되는데, 1990년부터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해 노력했던 일본의 센신스님, 중국 상하이에서 북한 불교대표인 심상진을 만난 남북합의를 이끌어낸 한국의 초산스님, 이들의 각고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 결실은 없었을 것이다.
김철기자(kimchul2@i-sunday.com) [2006-02-07 오후 2:5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