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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관련 보도자료

북관대첩비 北 귀향(歸鄕) - 개성 견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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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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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北 귀향(歸鄕) - 개성 견문기”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최초의 의병을 규합, 왜군을 격퇴한 전공을 기념하여 숙종33년(1707년)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리(현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워진 승전기념비이다. 1905년 러·일전쟁때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 미요시 중장이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가져간 뒤 항일 의병의 기상을 제압하고자 탑신에 큰 바윗돌을 올려놓은 채로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다가 100년만에 반환한 국보급 문화재이다.

 

  2005년 10월 20일, 일본이 강탈해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 중이던 북관대첩비가 민, 관 합동의 노력으로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10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지난 2월 25일 통일부로부터 갑자기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을 북한 개성시 명륜당에서 거행한다는 통보와 함께 방북허가증을 교부받게 되어 3월 1일, 3·1절 87주년을 맞아 민·관 합동인수위원회는 북관대첩비를 원소재인 함경북도 길주, 임명리에 복원시키고자 정부 관계부처 실무자와 문화재 위원, 민간단체대표 등 150여명을 태운 3대의 대형버스에 북관대첩비를 싣고,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이라는 대형 플랜카드와 깃발을 달고 북한땅 개성시를 향해 아침 7시 경복궁에서 출발하였다. 서울을 떠나 통일로에 접어들자 방북의 긴장감과 설레임이 교차하는 듯 침묵 속에 차 안은 조용했다.

 

  행주치마(임진왜란, 행주산성)에서 금 모으기(IMF)까지!

 

  국난극복의 원동력이 되었던 여성의 힘!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스더 4:14)

  굳건한 확신과 믿음과 신앙 속에 2004년 9월,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해 여성 지도자들의 힘을 결집하여 각계각층 대표 33人의 발기인 구성, 「북관대첩비환국범민족운동본부」를 발족시켜 동분서주했던 일들. 정부 관계부처와의 마찰과 정치적, 종교적인 갈등과 고뇌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며, 용서의 파수꾼이 되었던 일,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권력과 결탁하여, 강자가 약자를 위해 던지는 고단수의 정치적, 종교적 가혹행위들, 애국선열들의 높은 기상과 선각자의 숭고한 애국충정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 일본과 북한 민간 외교를 통한 북관대첩비 반환문제에 혼신의 힘을 다한 일들. 서해교전(2002년 6월)으로 인한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정책에 긍정적인 동북아 각국의 입장을 활용하여, 남북 민간교류를 통한 민족공존의 기틀을 마련해주시는 하나님! 일본정부 당국이 과거 역사를 참회하는 새로운 역사인식으로 북관대첩비를 반환해줌으로써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협력과 화합의 예표를 주신 하나님! 재일동포 하갑순 이사장(학교법인 해인학원)님의 조국에 대한 선지자적인 애국충정에 따른 재정적 후원에 힘입어 민, 관이 하나됨으로 남과 북 당국자의 창을 열게 하신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

  임진왜란의 잃어버린 역사와 우리 조상들의 혼을 되찾은 역사적인 사건에 사랑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지난날들의 어렵고 힘든 고뇌와 번민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갔다.

 

  어느덧 비무장지대 중간에서 한국군과 북한군이 선도 차량을 교대했다. 남북양쪽의 CIQ(세관출입국검역)수속이 아니라면 일산에서 개성까지 50분이면 충분한 거리이며 광화문으로 나오는 시간과 비슷할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3시간에 걸쳐오면서 물리적인 거리보다 더 먼 이념적인 거리의 안타까움에 만감이 교차했다. 

  북한 CIQ지역에서 차량검색이 진행되었다. 인민군 복장의 남녀직원이 소지품 검색과 남쪽신문 압수, 디지털카메라 등을 확인한 뒤, 큰 불편 없이 검색 절차가 끝났다. 북측 관계자가 웃으며 북관대첩비 의병장님들 고생 많이 했다고 하면서 비교적 관대한 대우를 하는 듯 했다. 

  

  CIQ지역을 넘어서자 개성공단이 나타났다. 토지공사 개성지사와 공장들이 보였다. 새로 지은 공장들이 산뜻한 인상을 주었으며 그 뒤로 현대아산 중장비들이 기반공사를 하고 있었다. 새로 조성된 공단이라 이방인들의 삶의 터전으로 시작하기에는 고도(孤島)와도 같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높고 낮은 산들은 나무 하나 없는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황량한 벌판과 도로에는 차가 보이지 않았다. 개성시내로 가까이오자 많은 사람을 싣고 어디론가 가는 트럭들이 눈에 띄었다. 차선과 신호등이 없는 거리에 자전거가 많이 다녀 운전하기가 퍽 조심스러울 것 같다. 남쪽차량의 출현으로 구경거리인 마냥 발을 멈추고 시민들이 바라본다. 영하 12~13도의 매서운 날씨에 두꺼운 방한모와 외투로 남녀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버스가 시내를 저속으로 운행하는 덕에 개성시내를 찬찬히 볼 수 있었다. 어둡고 삭막한 거리, 1960년대로 돌아가 흑백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학교 건물과 관공서 건물 벽에 써 있는 주체사상과 관련된 전투적인 구호와 김일성 부자에 대한 찬양 플랜카드가 붉은 글씨로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오전 11시. 개성 성균관 명륜당 앞뜰에서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이 진행되었다. 이 행사를 거쳐 북관대첩비가 북측에 인도됐다. 이 날 행사에서 느닷없이 북측관계자들은 사전예고도 하지 않은 채로 일본의 신사참배중지, 과거사 사죄와 보상, 독도영유권주장철회, 문화재반환 등 4개항을 요구하는 반일성명을 발표했다. 북의 강력한 규탄에 인도인수식을 거행하던 명륜당은 정치선전장을 방불케 했다.

 

  북측에서 마련한 자남산여관 오찬행사에는 6인용 원탁테이블마다 북한 요원들이 한 사람씩 배석하여 대화의 장을 마련하였다. 마침 내 옆에는 중앙일보 박기자가 앉았고, 맞은편에는 50대 초반의 북한공무복장(검은색)에 김일성 배찌를 단 북측요원이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서로 처음 상면한 서먹서먹한 자리에서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북관대첩비환국범민족운동본부의 본부장의 자긍심으로 명함을 건내 주며 “귀하의 소속과 하는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서슴없이 밝은 표정으로 국제정세와 남북간에 정치적 경제적 사정을 설명하면서 내 수첩에 ‘민주경제협력위원회 참사 리응식’이라고 서명해 주면서 개성공단에 나와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식사를 하면서 그는 나에게 당신은 애국자라고 극찬을 하면서 “이제 북관대첩비환수를 마쳤으니 앞으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북관대첩비환수로 인해 잠시 전력하지 못했던 한국여성지도자 10,000명을 선정, 한국여성지도자명감을 제작하는 출판 사업을 계속한다고 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남남북녀인데 통일해서 우리여성동맹지도자들과 합해서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고급간부로써 상당한 요직에 있어 실물경제며 남북문제에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자인 듯 했으며 1시간동안 좌중이 덕담을 나누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기념촬영도 했다.

  자남산여관에 토산품판매소는 난방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냉기가 감도는 가운데 한복차림의 판매원 아가씨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판매원에게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남한 근로자들을 만나봤느냐고 묻자, “일이 퍽 고되어 보이더군요. 그래도 남쪽기업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다. 식사를 마친 후 자남산여관과 근거리에 있는 선죽교 관광에 나섰다.

 

  어린 시절 위인전에서 고려충신 정몽주가 이방원 일파에게 살해된 선죽교 돌다리에 지금도 핏자국이 남아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보니 다리 상판에 베개 크기의 돌에 핏자국 무늬가 들어 있었다. 송도 사범대 역사학과 출신의 안내원은 조선시대 후손들이 정몽주의 충의(忠義)를 기려 핏자국 무늬의 돌을 상판에 놓았다고 설명했다. 선죽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돌다리가 나란히 남아있는 문화재다. 조선시대에 정씨 문중 사람이 개성 수령으로 부임했을 때, 조상의 혼이 깃든 다리를 밟고 다닐 수 없다며 사방을 돌난간으로 막고 통행을 위한 돌다리를 하나 더 놓았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는 명필 한석봉이 쓴 선죽교(善竹橋) 비(碑)가 서 있다.

 

  북한을 나오기 전, 북한 CIQ에서 디지털 카메라 사진 검열을 받았다. 북쪽 관계자는 남쪽 출판물에 안 좋은 사진이 가끔 실려 나온다면서 카메라는 가지고 오면 안된다며 주의를 주었다.

  북쪽지역 벌거벗은 황량한 산하를 뒤로한 채, 황혼이 깃든 비무장 지대를 넘어오는 동안 35년전 특수부대에서 군복무를 하는 동안 철의 삼각지를 넘나들면서 보았던 백마고지와 이이스크림고지, 철원 비무장지대 철책선, OP와 CP, GOP, 군진지와 벙커, 부비트랩 등을 회상해보면서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휴전선의 밤은 조용했다.

 

  북관대첩비환국은 슬기로운 지혜와 유연한 외교력으로 한국여성지도자들이 일궈낸 민간외교의 쾌거다. 지난 세월 한·일(韓·日) 고승(高僧)들과의 의기투합, 종파를 초월한 애국충정과 호국의지로 거시안적인 통찰력을 배웠으며, 남한, 북한, 일본간 과거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인식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북관대첩비환국운동은 한반도 냉전 상태를 완화하고 문화와 역사의 향기로 민족동질성 회복은 물론 한국여성지도자들이 결집되어 한반도 통일정책과 통일운동에 실천적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이며, 한·일 관계에 밝은 미래를 모색함으로써 동북아 그리고 세계를 향한 평화의 메신저로 그 사명을 담당하였다.

 

  이 일을 위해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기도로 힘을 더해주신, 담임 목사님이셨던 장영철 목사님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 최성규 목사님, 학교법인 해인학원 하갑순 이사장님 그리고 대신교회 교우들과 우리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박근목

한국여성지도자명감편찬위원회 대표

북관대첩비환국범민족운동본부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