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북관대첩비 북한 인도 관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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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18-11-09 11:36 조회443회 댓글0건본문
○ 질의서 내용
1) 이사장님, 2006년 3월 1일은 북관대첩비를 북한에 인도한 날인데요,
먼저 북관대첩비가 무엇이고, 왜 국보급 문화재로 불리는지 설명해 주시죠.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정문부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규합, 왜군을 격퇴한 전공을 기념하여 숙종33년(1709년)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리에 높이 187㎝, 너비 66㎝ 화강석 규모에 1,500자의 기록으로 정문부 장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념해 세워진 승전기념비이다.
1905년 러·일 전쟁때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께다 소장이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가져간 뒤 항일의병의 기상을 제압하고자 탑신에 큰 바위를 올려놓은 채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방치되어 있다가 2005년 10월, 100년 만에 민·관 공동노력과 북한 당국의 협력으로 반환받아 2006년 3월 1일 북한에 인도되어 원소재지인 함경북도 길주시 임명리에 부원한 국보급 문화재이다.
-> 북관대첩비란? + 왜 국보급 문화재인가?
왜 국보급인가?
1. 제작연대가 오래되였다.
2.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크다.
3. 시대의 표준이 되고, 제작기술이 우수하고 흔하지 않다.
4. 함경도의 유서깊은곳과 일본 야스쿠니 신사와 역사적 인물과 관련되어 있다.
2) 이사장님은 어떻게 해서 1905년 일본이 강탈해 도쿄(東京)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보관 중인 북관대첩비에 관심을 갖게 되셨어요?
-> 북관대첩비 환국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재일교포시며, 경남 합천군 소재에 학교법인 해인학원(해인중학교) 하갑순 이사장님을 양어머니로 모시고 있어, 90년대에 일본에 가니 가끼누마쎈신 스님과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을 펼치고 있어 깊은 감명을 받고 시대적 사명감으로 어머님과 함께 반환운동하게 되었습니다.
3) 1978년 최서면 박사가 야스쿠니신사에 있는 이 비를 확인한 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반환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못 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은 왜 돌려주지 않은 겁니까?
-> 지속적인 반환 요청에도 일본이 북관대첩비를 돌려주지 않은 이유는?
1. 야스쿠니신사 소유물로 일본정부가 강제할 수 없다.
2. 불법으로 강탈 반출했기 때문에 당사국간 국민 정서에 위해성 논란 대상
3. 북한이 원소재지이므로 북·일 수교후 반환하겠다.
4. 남·북, 일본간 정치적, 역사적 문제
5. 북관대첩비를 통한 승전비에 대한 역사왜곡으로 일본군 자존심 훼손
4) 결국 2005년, 북관대첩비 환국을 위한 범민족운동본부가 발족했고, 이사장님이 본부장을 맡으셨는데요, 북관대첩비 환국에 힘을 모은 것은 우리 만이 아니라구요?
남북이 공동으로 반환운동을 벌였다고 하던데,
북한이 어떻게 반환운동에 참여하게 됐고, 어떤 활동을 함께 전개했는지,
당시 얘기를 들려주세요.
일본 가끼누마쎈신 스님 (일·한 불교복지협회 회장)이 북한 조선불교도연맹을 방문, 남북공동반환추진 제의로 남측 한·일불교협회 회장 초산스님(북관대첩비 환국범민족운동본부 공동 집행위원장) 앞으로 공문을 보내와 공동추진하게 되었습니다.
-> 북한은 어떻게 북관대첩비 환국 운동에 참여하게 됐나?
/ 북관대첩비 환국 운동을 위해서 남북이 공동으로 기울인 노력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는 “특별민간법인” 성격이므로 일본정부가 강제할수 없으므로 남북 공동으로 민간차원에 합의 반환요청서를 통해 한·일 당국간 합의, 반환 요청으로 야스쿠니 신사 이사회 결의로 반환 받게 되었습니다.
5) 이같은 노력으로 2005년 10월 20일 일본 정부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반환받았습니다.
만감이 교차하셨을 것같은데요 당시 감회는 어떠셨구요,
북측 인사들과는 어떤 감동을 나누셨습니까?
-> 일본 정부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반환받기로 했을 때, 느낀 감회는?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에 감사드리고 100년만에 남·북 일본간 민간외교를 통한 역사적 사건에 감개무량하였습니다.
/ 당시 북측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민족끼리 불가능은 없다는 반응이였습니다.
/ 북측 인사들이 한 말이나 감동적인 행동이 있다면 소개
임진강 하류지역 모래와 개성인삼을 주겠다고 호언장담이였습니다.
6) 2005년 10월 20일 고국으로 돌아온 북관대첩비는 2006년 3월, 북한으로 인도됐습니다. 북관대첩비를 북한에 인도한 까닭은 무엇이었구요,
3월 1일.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 북관대첩비를 북한에 인도한 까닭은?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와의 원상복원이 약속이였습니다. 또한 2002년 월드컵때 연평해전으로 남북관계가 두절된지 3년차로 2005년 4월 23일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 아세아-아프리카 정상회의 참석한 이해찬 국무총리가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일본에 있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논의하기 위해 당국자간 회담을 열자는 이총리 제의에 대해 김위원장이 적극 추진하겠다고 하여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답 (정동영 통일부장관 – 북측, 권호응 내각책임참사관) 남북 합의사항중 “북관대첩비 반환 남북 공동추진합의서”를 채택(서울) 남북대화의 창을 열어 평화의 메신저로 북한에 인도되게 되었습니다.
/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 분위기 회상
북한측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장을 마련하여 일본이 강탈한 한국문화재, 위안부문제보상, 독도영유권, 일본 교과서 왜곡 등 일본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서 낭독 등으로 엄숙한 행사장이 혼란스러웠습니다.
7) 북한은 3월 23일. 함경북도 김해시 임명리에 북관대첩비를 다시 세웠는데요
이 때도 혹시 북측을 방문하셨습니까?
-> 북한이 북관대첩비를 함경북도에 다시 세운 날, 북한을 방문하셨는지? + 그 이유는?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초청하지도 않았고, 이유는 남북 당국에 대한 북한 당국의 자존감과 정치적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8) 북관대첩비는 한국 곳곳에 복제비가 있는데요, 어떤 곳에 있구요 남측에 복제비를 세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 북관대첩비 복제비가 세워진 장소는?
1. 경복궁내 고궁박물관 뒤뜰
2. 독립기념관
3. 경기도 의정부 정문부장관 묘소 앞 (충덕사)
4. 경남 진주 충의사 뜰
/ 한국에도 북관대첩비를 세운 이유는?
국보급문화재로 애국충정과 호국의지로 민족자존의 표석을 재조명하고, 후세들을 위한 역사적 교훈을 승화시켜 민족혼과 정기를 바로세우고자 합니다.
9) 북관대첩비 반환의 의의.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 북관대첩비 반환 의의는?
북관대첩비 반환과 복원은 1) 왜국과의 승리 2) 민족수난 3) 통일운동 실천으로 국가, 민족, 언어, 역사, 문화, 종교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애국충정과 호국정신 함양으로 남·북, 일본간 문화 의병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일궈낸 민간외교의 쾌거요, 역사적 사건임과 동시에 남북화해 협력으로 잃어버린 역사성 회복과 남북공존의 기틀과 동질성 회복에 단초가 되었으며 한·일간 미래지향적인 관계개선을 도모함으로써 통일기반 조성과 동북아평화 구축에 이정표를 제시함과 동시에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정신을 수행 실천함에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10)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와야 할 문화재가 많이 있는데요, 문화재 반환 운동에 남북이
다시 힘을 모을 때가 올까요?
-> 문화재 반환 운동에 남북이 함께 해야 하는 이유와 기대로 마무리
북관대첩비 반환에 경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을 비롯한 20개국에 16만점에 해외유출문화재 반환운동을 남·북 공동으로 추진함으로써 평화통일기반 조성에 가교(架橋) 역할은 물론 세계속에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켜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민족자산을 물려줘야하는 이유이며, 외교통상부나 문화재청 그리고 관계기고나들이 발벗고 나섬으로써 국내외 동포들의 힘과 지혜와 협력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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